해마다 찾아오는 내 봄의 초상화
친정어머니께서는 해마다 정이월이면 고추장을 담그신다. 간장은 묵을수록 맛이 들지만 고추장이나 된장은 오래되면 본래의 맛이 떨어지게 되니 해마다 새로 담그는 것이라고 하셨다. 고추장 단지를 쳐다보면서 이제나저제나 시집간 딸 오기만을 기다리실 것을 생각하여 전화를 받자마자 하던 일을 멈추고 곧장 친정엘 갔다. 어머니께선 아직 삭으려면 멀었지만 햇맛 한 번 보라면서 선홍으로 붉게 빛나는 고추장을 내어놓으신다.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니 혀끝에 닿는 맛이 매콤하면서도 부드럽다. 솥에서 막 퍼 담은 하얀 밥 위에 달래와 돗나물을 얹고 참기름 한 숟가락을 두른 후에 척척 비벼 간단하게 새참을 했다. 알싸하게 남은 매운맛과 봄나물의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다. 이마에 맺힌 작은 땀을 씻으려 창문을 열었더니 밀려들어오는 바람마저 부드럽고 향긋하다.
마당에 나가보니 좁은 공간이지만 제 몸을 곧추세우고 선 감나무와 앵두나무에도 꽃눈과 잎눈이 맺혀있다. 그리 많은 눈길을 주지 않아도 동그랗고 볼록한 눈은 머지않아 한 송이 꽃이 될 것이다. 길쭉하면서도 잘록한 눈에서는 연두 빛으로 새잎이 나고 한층 길어진 햇살을 들이마시고 나면 진한 초록으로 윤이 나겠지. 나무가 서 있는 땅 역시 부드러워 보인다. 자세히 굽어다보니 물기를 머금어 촉촉한 곳에서는 어느새 잡풀이 기지개를 펴고 올라오고 있었다. 두터운 외투차림이라 아직 겨울인줄 알았는데 저 땅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봄의 전령들이 다녀간 모양이다.
난자의 줄기세포 복제로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소와 돼지를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기능을 가진 초소형의 핸드폰에다 화상전화를 통해 중국에서 열리고 있는 6자 회담의 내용을 시시각각으로 전해 받을 수 있으며, 도지사와 시?군 단체장들이 화상회의를 하면서 도정을 협의하는 오늘이지만, 이처럼 오묘한 자연의 힘만은 누구라도 거스를 수 없는가보다.
어릴 적에는 동네 언니들을 따라 나물을 캐러 다녔다. 언덕에 엎드려 먹을 수 있는 나물인지 아닌지를 하나하나 물어가면서 작은 대바구니가 가득 찰 때까지 나물을 캤다. 찬바람이 가시지 않아 시린 두 손을 입에 대고 호호 입김을 불어넣기도 하였지만, 알록달록 프리즘으로 반사하여 내려앉은 봄볕으로 등은 참 따스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봄나물에 생굴을 넣고 된장을 풀어 끓인 국이다. 저녁나절이면 군불이 필요한 방으로 통하는 아궁이에 걸린 검은 가마솥에서 나물국은 하얗게 김을 내뿜으면서 끓었다. 할머니께서는 가끔씩 불을 조절하던 부지깽이를 내려놓고 일어나시어 젖은 행주로 솥뚜껑을 휘휘 닦으셨다. 그럴 때마다 연한 수증기들이 무리 지어 소리를 내며 하늘로 올라갔고 행주가 쓸고 지난 자리에 남아 있던 물기는 이내 감쪽같이 말라 사라졌다. 더욱 윤기가 자르르해진 검은 솥뚜껑은 흑과 백이 어우러진 한 폭의 풍경화였다. 내 그림 속에 담긴 것들은 검불로부터 보호하고자 머리에 쓴 세수수건과 치마를 끌어올리느라 허리에 두른 허리끈, 제법 닳아 누르딩딩해 보이던 하얀 고무신 그리고 구수한 나물국의 냄새다. 이들은 모두 해마다 찾아오는 내 봄의 초상화이다.
당나라 시인(詩人) 백낙천(白樂天)은 그의 시 <낙화고조부(洛花古調賦)>에서‘유춘춘불주 춘귀인적막 염풍풍불정 풍기화소내(留春春不駐 春歸人寂寞 厭風風不定 風起花簫奈, 봄은 좋더라 머물지 않아도 저만 가고 우리는 남아 서럽지 바람은 싫더라 나는 싫더라 꽃샘에 지는 꽃이 너무 많아서)’라고 읊어 짧은 봄과 바람에 지는 꽃의 아쉬움을 노래했다.
지금은 이런 저런 일들로 우리 사회가 다소 춥고 번잡하지만 청매, 홍매 모두 피고 개나리, 진달래, 살구꽃에다 하얗게 배꽃이 지천에 깔리고 나면 우리네 가슴에도 훈훈한 봄이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친정집 마당에 서 있는 나무를 쓰다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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